사실 그런 현실이 한국영화의 비극씩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산업논리가 득세하는 이 곳에서 B급좌파의 불만은 허망한 푸념일지 모른다. 그러나 열악한 여건에서도 어디선가 힘겹게 분전하고 있을 우리의 켄 로치들에게 박수를!
근래 본 켄 로치의 영화에 작은 감상 하나 남기려던 것이,
대책없이 서두만 길어졌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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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남녀와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 그리고 갈등, 이별과 재회. 영화는 여느 멜로와 다를 바 없이 전개된다. 다만 특별한게 있다면 연인이 마주하는 장애가 불치병이나 출생의 비밀 따위가 아닌 종교와 인종,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이 해묵은 인간 집단간의 갈등이 위력을 발휘하는건 비단 전쟁과 테러만이 아니다. 일상 속에 침투한 차별과 배제의 쟁투가 개인의 삶과 사적 관계 속에서 지겹도록 반복된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주인공 카림의 아버지이다. 파키스탄 출신 이민 1세대인 그는 자기 세대의 가치로 자식들의 삶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지극히 완고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그에게 분노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만 치부하기에 그가 체현하는 역사적 상처가 너무 깊다. 타고난 인종과 종교적 차별로 인해 온갖 박해와 멸시 속에서 살아야 했고,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까지 잃었던 그에게 아들의 행동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미워할래야 도저히 미워할 수 없고, 이해하기 싫어도 결국엔 이해하게 되는 그들. 그들이 항상 문제다.
히틀러를 설명하는 수사가 거칠고 험악해질수록 그에게 보낸 독일 국민의 열광과 지지라는 또 다른 사실은 망각되는 경향이 있다. 전쟁과 학살의 동조자이자 직접적 수행자였던 당대의 상당수 독일인들에게 부여되는 역사적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안타깝게도 히틀러와 나치는 정권을 탈취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선거라는 형식으로 모아진 독일 국민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패전의 상실감과 대공황의 파괴적 여파 속에서 부국강병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그들에게 독일 국민은 뜨겁게 화답했다.
물론 선거를 통해 집권한 히틀러는 민의와 법의 이름으로만 통치하지 않았다. 미디어를 통해 치밀하게 여론을 조작했고, 강압적 사회분위기 조성과 이데올로기 교육을 통해 대중의 사고와 행동 반경을 축소시키고자 했다.
이런 식의 위험한 정치행태가 지난 세월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 바 있음을 몸으로 겪어온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난해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다행인건 결정적인 순간마다 드러나는 저들의 무능과 무식함이고,
혹시나 두려운건 우리의 체념과 무감각이다.
나이 앞자리에 붙이는 숫자 하나 변했을 뿐인데,
마치 노래 가사처럼 머물러 있을 것만 같던 청춘이 저만치 멀어져버린 느낌이다.
사실 진작에 등돌리고 미련하게 놓쳐버려서 이제는 퇴색되어 가는 인생의 푸른 순간들이 말이다.
달력이 넘어가고, 해가 바뀐다고 무엇이 그리 달라진다고. 공연한 감상이다.
나이 서른에 우린
술자리에서 이 노래가 들릴때면 가사 속 질문을 가볍게 서로에게 던지곤 했었다.
별의미도 생각도 없는 흰소리들을 주절거렸던 거 같다.
막연하게 두려웠지만 대책없이 자신있기도 했다.
막상 서른이 되고 나니 '서른 즈음에'보다 경쾌한 멜로디의 '나이 서른에 우린'이 더 애잔하게 들린다.
거울 속 내 얼굴과 일상의 고민들이, 앉아있는 이 자리와 사랑하고 있는 것들이
오늘을 떠올리던 푸른 시절 앞에서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광석이 형이 말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날의 생이여 ㅡㅡ"
누가 뭐래도 2008년 최고 이슈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다.
전쟁과 금융 파탄의 폐허에서 미국은 이 섹시한 흑인 남자를 선택했고, 그는 변화하는 미국의 상징으로 전세계의 기대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이런 외부적 상황과 상당 부분 맥을 같이 한다.
허무와 실망의 끝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 SF 신파극이 약간이나마 흥미로운건 그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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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런 경우 주된 배경은 미국이 된다. 굉장히 현실적인 설정인 듯 ㅡㅡ)
"과연 인간은 폭력적이고 이기심만을 가진 구제불능의 존재인가?"
최종심판에 앞선 그의 물음이다.
2. 대강 짐작이 가는 두 부류의 인간들이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백인 여성과 그녀의 양아들인 흑인 소년(오호!), 그녀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라크에서 사망했다(이런!). 그 전쟁의 장본인일 것이 분명할 전화기 너머의 대통령과 그의 명을 받들어 폭력진압 진두지휘하는 여성 장관, 상명에 죽고 하복에 사는 각종 군바리 집단(쯧쯧!).
3. 고민하는 키아누에게 제니퍼는 반복해서 외친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변할거예요!", "우리에겐 기회가 필요해요!"
이에 우리의 네오, 메시아 키아누는 장렬히 화답한다.
"이런 착한 사람들!"
4년후 혹은 8년후 그들은 얼마나 변해 있을까.
경험적으로 봤을때 큰 기대는 안 하는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
지난주 내내 미친듯이 영화만 봤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딱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어나마자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 앞에서 골아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15편 정도의 영화를 본 것 같다. 눈알이 빠질 것 같다라는가 허리가 끊어질 거 같다는 상투적인 표현들을 절절하게 몸으로 느끼며, 감상이나 향유라는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게걸스런 소비행위를 지속했다. 정신을 차리고 돌이켜보고니 무슨 영화를 봤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 허망함을 달래며 지난 주를 함께한 몇 편의 영화에 느낌표를 찍어본다.
비포 선라이즈 & 비포 선셋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와 미묘한 감정의 교감만으로도 화려한 액션이나 유려한 스토리 전개 못지 않은 흥분과 감동을 자아낸다. 9년의 시차를 두고 개봉한 두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현실의 그것과 일치한다. 연희동 골방의 내가 클릭 몇 번으로 무심히 뛰어넘은 9년의 시간 동안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그 만큼의 세월을 체현하고 있었다. 지워진 시간동안 우리의 두 주인공 셀린느와 제시는 일상 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간직했을 터이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헐리우드식 문법으로 전하는 아프리카의 실상. 풍요로운 자원이 갈등과 억압을 초래하는 아프리카의 역설적인 현실에 영화는 '소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다분히 계몽적이고, 상당 부분 따분하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풀어내는가'와는 별개로 이야기를 꺼내는 시도 역시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크래쉬
현실의 모순은 중층적이다. 이브닝 드레스를 차려입은 부르주아 흑인 여성과 아버지의 병원비를 걱정하는 백인 남성 경찰, 히스패닉 노동자와 아랍계 자영업자. 아시안 이민자들에게 동정을 베푸는 흑인 범죄자, 흑인을 살해하는 휴머니스트 백인.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군상들의 관계를 건조하게 묘사하는 '러브 액추얼리'의 글루미 버전 정도가 될 듯.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백선생과 봉총각. 두 사람의 '개인기'만으로도 빛을 발하는 영화. 애정결핍은 애정과잉의 형태로 드러나는가 보다.
예의없는 것들
신하균표 연기가 절절히 묻어나는 영화. 농아와 킬러는 이제 신하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