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머무는자리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voskresni 2006. 9. 11. 02:01

'정수일'이라는 '역사학자'를 아시는지. 정수일이라는 멀쩡한 이름 석자와 평생을 통해 일궈낸 학문적 과업에도 불구하고 무하마드 깐수라는 가짜 이름과 간첩이라는 서슬 퍼런 낙인 속에 갇혀 종국에는 사형 선고까지 받아야 했던 비극적 지식인을.

작년 가을 학기, 정수일 선생님으로부터 '동서문화교류사'라는 수업을 들었다. 부정확한 한국어 발음과 이해하기 좀처럼 쉽지 않은 그만의 개념체계, 쇳소리에 가까운 음성, 교재 강독과 항목 나열식의 강의. 지루하기 그지 없었던 수업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기억이다.

학기 내내, 그는 자신이 기획하고 있는 연구과제들에 대해서는 엄청난 열정을 발산했던 반면, 수강생 대부분의 관심사였던 어쩌면 본인이 더욱 나누고 싶었을지 모를 자신의 과거와 세계관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다. 당시 나는 그를 구속하는 외적 강제를 떠올렸고,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남한내 고정 간첩 무하마드 깐수가 아닌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자세로 지성의 양식을 통해 겨레에 헌신'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진해 온 '학자 정수일'이 아닌가.

덧>
1.
참고할 만한 글들 (특히, 황석영이 쓴 '내가 만난 깐수'를 읽어보시길.)
2.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옥중편지를 모은 그의 자전적 수기)
3.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에 대한 서평
(이신조의 책과의 밀어, 주간한국. 200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