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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4. 12. 08:11

내 아비의 슬픈 선물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었다. 내자식 남의 자식에 뒤질새라 거금을 투자하기로 결심하신 아버지, 생판 남 보다는 사돈에 팔촌이라고 거쳐야 믿을만하다는 생각에 회사동료의 사촌동생인가 하는 컴퓨터 회사 직원에게 부탁을 하셨다. 도무지 알 길 없는 컴퓨터라는 요망한 물건에 백단위의 거금을 선뜻 내놓으시기가 아무래도 조심스러우셨을게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지만은 않았을 그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의 회사동료의 사촌동생"은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거액의 최신형"이라는 물건을 손수 들고 집까지 방문하여 설치까지 해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그의 그런 태도에서 오는 안도감에서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거액! 신형! 역시 아는 사람이 최고!에 대한 자랑을 시작하셨고, 호방한 아버지의 떵떵거림은 한동안 주위 사람들의 귀가 피곤할 정도로 계속되었다.
그날부터 컴퓨터 서적을 주워 읽고 주위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관련 지식을 쌓았갔다. 그렇게 컴퓨터와 친해질수록 서글퍼졌다. 불신, "아는 놈이 더 무섭다"는 인간사의 비참한 회의.

그 주인에 그 컴퓨터
그렇게 사용하기 시작한 터무니 없는 "거액"의 꽤 오래된 "신형" 컴퓨터와 사년 정도를 함께 했다. 때로 철없는 주인의 무모함을 블루 스크린으로 보호하고, 막무가내한 조급함을 절제된 처리속도로 타이르기도 했지만 우수하지 않은 사양의 주인과 할만큼은 하는 컴퓨터의 궁합은 썩 잘 맞았다. 약간의 허무함 속에 Y2K를 넘기고 방심하던 찰나 침투했던 체르노빌(CHI) 바이러스와 벌였던 치열했던 전투, 종강기념 레포트, 속성 세미나 발제문 등의 긴급한 사태를 힘겹게 무마시키며 마시던 새벽공기, 철지난 고전게임과 밤새 씨름하던 날들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는다.

재회 오늘 창고에 박혀 긴 수면에 있던 녀석과 재회했다. 비록 달랑 하드디스크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자료들에 들뜬 기분을 달랠수 없었다. 2.1기가의 기억은 기대보다 상당했다. 레포트, 잡글들, mp3파일, 이미지들이 열어보이는 이십대 초반의 향수에 젖어 궁상맞게도 한참을 혼자 미소지었다.
과거라 하기도 민망한 얼마 전의 시간이건만 이렇게 특별한 계기가 없이는 부러 끄집어내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갈 수 없다면 추억하지 않는 편이 좋을거라는 미련한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한 그리움임을 알고 있다.